<조각난 길 위에서> 나에게는 여전히 안부를 주고 받는 70대 할아버지 친구가 있다. 갈대처럼 휘청이던 파란 눈의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초록 숲내음이 코를 간지럽히던 2019년 7월이었다. 4년이라는 짧지만 오랜 시간동안 미국이라는 타지에 있으면서 항상 소속감과 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땅을 굳건히 밟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고 항상 외부인, 여행객, 방랑자처럼 물 위를 유영하듯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미국 중부의 숲 속에 외따로이 자리잡은 한 레지던시에서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주시는 Peterson 부부를 만나면서 드디어 이 낯선 땅에서도 잠시 마음을 뉘일 수 있는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두어 번 더 이 곳에 초대되어 할아버지와 함께 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Clifford Peterson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였다. 할아버지는 퍼포먼스나 조각, 설치 작업을 하는 나와는 굉장히 다른 방식의 작업을 하시는 분이었다. 그 분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숨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나는 그렇게 명상 혹은 수행을 하듯이 작업을 하시는 그 분의 모습이 좋았다. 비록 그 당시의 나는 언어도 서툴고 수줍음도 많았지만 우리가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성별, 나이,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며 서로에게 시나브로 스며들듯 대화에 빠져들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시작했던 대화는 해가 지고 밤이 어둑해 지도록 계속되었다. 반딧불이가 별처럼 반짝이던 선선한 여름 밤 내음 속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던 대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우리의 협업은 오랜 시간 전에 이미 정해져 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초록 향으로 가득 찬 숲이 붉게 물들고 성숙해진 잎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관계, 삶”이라는 주제로 함께 작업을 만들었다. <21.07.03 Rosette #1> 작품은 할아버지와 함께 한 작업 중 하나이다. 할아버지가 매일매일 수련하듯 드로잉을 하면 나는 그 드로잉을 재해석해서 '삶'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각작품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 속 허공을 맴도는 길들은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연결되어 꽃을 피운다. 녹슨 금속은 옛날 마구간의 외벽으로 사용되어 뜨거운 뙤약볕과 온갖 비바람을 견뎌냈던 것으로 10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저마다의 이야기와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이자 섬유 예술가인 Lisa Lee Peterson은 이 작업을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금속 조각들을 올려다보면, 마치 목적 없이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것과 같다." 이 외에도 나는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남은 철 조각들을 모았다. 이 과정 속에 버려진 조각들을 꿰매어 서로를 지탱하는 생태계인 <P 615>라는 행성을 만들었다. 이 행성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이해 가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고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자>. <조각난 길 위에서>에는 상실을 겪으면서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집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나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서지고 조각난 길들이 어느 순간 꽃을 피우듯이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고, 단절 속에 연결이 있으며, 불완전함 속에 완전함이 있다. <길을 잃기 위한 현장 가이드>라는 책에서 저자 레베카 솔닛이 이야기했듯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완전히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한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미지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시 작가 : 정은형전시 제목 : <조각난 길 위에서>관람 기간 : 24.4.25 - 24.5.5Wed-Sun 13:00-19:00 Mon,Tues Closed전시 장소 : WWW SPACE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로 6길 37, 지하1층)http://www.wwwspace.krhttp://www.instagram.com/www__space